나의 신앙유산 답사기5(호남편), 사림과 붕당정치

사림의 부패는 임진란과 병자호란 초래

편집인 | 입력 : 2020/01/15 [16:12] | 조회수: 243

훈구파의 부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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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구파는 조선 전기의 양반 관료층 내부에 형성된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일명 관학파라고도 불리운다. 훈신()·훈구대신·훈구공신 등의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훈구'는 국가에 공훈을 세운 공신과 그 계승자 및 여러대에 걸쳐 관원을 배출한 관원들을 말한다.  이들은 조선 초기 세조의 집권을 도와 공신이 되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면서 형성된 중앙집권 정치 세력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조선건국 이후 서로 긴밀한 혼인 인척관계를 맺으면서 계속 중앙관직을 지낸 명문 출신들이다. 세조 때 훈구파 인물들 다수가 바로 그들이다.


세조의 업적은 '왕권강화'와 '중앙집권화'였다. 태종 때 외척 숙청 등으로 왕권 강화를 이루었었으나 세종,문종을 거치고 신하들과 함께하는 정치가 계속되면서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이 사라졌다. 그러나 세조는 6조 직계제를 부활시켜 의정부의 권력을 낮추고 왕권을 높였다. 또한 세조는 세종 때 큰 역할을 가졌던 집현전을 폐지하며 오직 왕이 모든 권력을 가지는 체제로 넘어갔다. 세조는 중앙집권 정책도 강력하게 추진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호패를 실시한 것이다.

 

세조의 왕위찬탈을 돕고 정당화시켜준 훈구파가 대거 등장하면서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되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대부분이 청와대와 공사, 행정직, 국회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들은 조선의 권력을 장악하고, 항시 왕주위에 있으면서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넓은 부동산과 막강한 재산을 축적했고, 민중들에 대한 앞날과 염려를 하는 것 보다 왕과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들로서 백성들보다는 왕권에 의존하는 사람들이었다. 훈구파는 신하는 모름지기 왕에게 충성을 해야 한다고 보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권력을 위하여 왕을 이용하기도 했던 사람들이다. 

 

조선초기에 훈구파는 민중보다는 국가와 왕실의 존엄성을 높이는데 촛점을 두었다. 그러다 보니 세조 찬탈시 불의에 앞장서고 불의를 두둔함으로서 자신들의 권력찬탈에만 관심을 갖고 지조있는 반대파들을 숙청하는데 앞장서고 정권에 집중함으로 점점 세속정치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학자들이 정치의 맛을 보게 되니 타락과 부패의 길로 치달았던 것이다. 조국사태도 마찬가지 이다. 조국도 정치맛을 보지 말아야 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선거를 할 때 당사자들은 백성을 위한다는 구호를 연일 외치면서 정치의 맛을 보지만 대부분의 학자나 율사출신들이 정치의 맛을 보면서 부패의 늪에서 허우적 거리게 된다. 

 

이에 비해 사림은 그동안 훈구파에 가려 초야에 묻혀서 학문활동만 하여 왕도정치를 구현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었다.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할 목적으로 사림파를 주요 요직에 임명하면서 대거 정치에 입성하게 된다. 선조 때는 그들이 훈구파를 압도하여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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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은 지나치게 비대해진 훈구 세력을 견제하고 사림과 훈구 세력 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사림을 등용하였다. 성종 때에 사림은 김종직과 그 문인을 중심으로 진출하였다. 주로 사림은 과거를 통해 전랑과 3사의 언관직에 등용되어 훈구 세력의 부정부패와 대토지 소유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처럼 사림파는 성종 때 새로이 정치에 입문하게 되는 사람들로서 왕권이나 고관대작보다는 시골 향촌에 토대를 둔 신흥 정치세력이었다. 즉 재야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이 중앙 정치무대로 이동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재야 세력들, 핍박을 받던 민주화세력들이 중앙정치로 이동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역사가 증명하듯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중심에 들어가 정권을 잡으면서 중심부에 있었던 사람들을 주변으로 몰아낸 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후세대가 대통령이 되면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모두 보내고 있다. 교계에서도 후임자가 세력을 잡으면 전임을 몰아내는 것이 현실이다. 당시도 서로 몰아내기 위하여 사림파가 훈구파와 대결하고, 사람파 안에서도 서로 대결하여 분당정치를 꽃피웠다. 사림의 동인과 서인의 대결등에서 오늘날의 지역정치와 파당정치가 잠재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호남과 영남이라는 지역정치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이미 수백년전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사림파들은 처음에는 성리학 윤리를 철두철미 준수하는 사람들을 군자라 판단했고, 군자들은 서로 결속하여 붕당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성리학을 종교적으로 판단하고, 실천을 통하여 성리학을 구현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훈구파의 부국강병이나 왕권에 대한 관심보다 백성들에게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의 야당(자유한국당)보다는 여당(민주당)에 가까운 복지정책을 구사하려고 노력했다. 현재 여당의 하는 일들은 원자력수출이라는 부국강병보다는 약자들의 복지에 더욱 관심을 갖고 있다. 자사고나 특목고 등 특정 고관대작을 위한 교육보다는 서민 자제들의 평준화 된 삶에 촛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자사고 특목고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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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보니 현정부는 교육사회주의, 경제사회주의, 정치사회주의, 사법사회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이미 사림파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국가의 부국강병에 토대를 두는 왕당파적 세력이라기 보다는 왕에 대한 비판과 서민복지에 관심을 두는 정책을 하는 등 하여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다 보니 훈구파로 부터 수 많은 희생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림도 정치의 맛을 보면서 부패하기 시작했다.

 

사림파의 부패와 붕당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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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가 성종때 등단하여 선조 때 전성기를 이루었지만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붕당정치를 시작하게 된다. 붕당정치는 그야말로 당쟁이었고 조선을 멸망길로 가게하는 지름길이었다. 사림파가 훈구파의 탄압인 사화()를 극복하고 선조대에 권력을 장악한 후에, 그들 사이에 붕당()이 분기되어 자체 경쟁과 대립이 심화되었다. 사림파의 정계 장악으로 관직에 오를 자격자는 많아졌으나 관직은 한정되어 있어 필연적으로 당파의 분열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선조이후 사림파가 훈구파를 몰아내고 중앙정권에 편승하면서 오랫동안 주변인들의 삶에 있었던 순수 학문의 절개와 충절, 의리 등의 정신을 망각하고 국가와 백성들에 대한 안위는 상관없이 사색당파에 머물게 되었다. 사림은 국가의 부강과 백성들의 복지에 상관없이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을 위하여 끊임없이 파당 분열을 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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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과 서인: 인사권자의 자리때문에 분파

 

먼저 사림의 주축은 동인과 서인이었다. 동인은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쪽 건천동에 있다는 데서 유래하였고, 기존 훈구파에 강한 비판 의식 있는 젊은 관료를 중심으로 성립한 당파다. 그러나 1576년 조선시대 조정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전랑의 자리를 놓고 김효원과 심의겸의 의견 차이로 인해서 동인과 서인이 나뉘게 된다. 심의겸의 집은 서울 서쪽 정릉에 있었기 때문에 서인으로 되었다. 즉 보직때문에 동인 서인으로 나뉘게 되었던 것이다. 국가보다 파당의 이익을 우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당파의 이익은 훗날 동교동계와 상도동계에서 잘 나타난다. 모든 국민이 원하는 민주주의라는 대의보다 당파의 이익을 앞세운 나머지 군사정권의 하수인인 노태우에게 정권을 빼앗게 버린다. 국가의 이익보다 당파의 이익을 우선한 결과이다. 

 

이는 사림파에서 이미 나타났던 분당의식이었다. 불행하게도 동교동게와 상도동계는 이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여전히 한국은 분당과 파당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은 대부분이 호남사람들로 구성되었고 자유한국당은 대부분 영남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서인이 이이의 학문을 계승하였다면 동인은 이황, 조식, 서경덕 등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였고, 지역적으로는 영남, 강원에 기반을 두었으며, 시기적으로는 사림파가 본격적으로 집권한 선조 때 처음 등용된 신진 관료들이 중심 세력이었다.

 

동인은 조선 시대 붕당정치 초기 당파이며, 1575년(선조 8) 동서분당으로 생긴 당파 가운데 하나였다. 동인은 다시 정여립의 옥사를 계기로 서인에 대한 원한이 커지면서 강경론을 주장하는 북인과 온건론을 주장하는 남인으로 분열되어 1589년 해체된다. 동인의 중심 인물은 류성룡·이산해 등이며, 1584년(선조 17년) 동인 득세 이후 격렬한 당쟁이 시작되었다.

 

남인과 북인: 정철의 처벌수위때문에 분파

 

동인은 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을 지지하다가 실각되었다. 당시 동인의 몰락으로 관동별곡의 저자 정철을 비롯 서인이 왕권에 편승하여 정권을 잡았지만 정철이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건의를 했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아 서인이 실각하였고 이때 다시 동인이 득세했다. 동인과 서인의 실각과 등극이 한 끝의 차이로 오르락 내리락 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천당과 지옥이 왔다 갔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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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정철에 대한 처벌수위를 놓고 남인과 북인의 입장이 달라서 서로 나뉘었다. 처벌을 강하게 하자는  정인홍(鄭仁弘) 등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는 북인으로 되고 류성룡(柳成龍) 등과 같은 온건한 입장을 주장한 사람은 남인이 되었다. 이황(李滉)과 조식(曺植) 및 서경덕(徐敬德)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있던 동인 중 이황의 제자들이 주로 남인이 된 데 비해 북인은 조식 및 서경덕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했다. 훗날 정약용은 남인 계열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북인은 다시 나뉜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북파이고,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소북파로 다시 나뉘었다. 소북은 유당과 남당으로 다시 나뉘었다. 조선시대의 사림은 끝없이 핵분열을 하였다. 이러한 당파의 분열은 오늘날 정당의 분열에서 그대로 재현되었고, 개신교의 장로교단에서도 명분없는 사소한 이해관계로 인해 그대로 재현된다. 

 

 노론과 소론:남인의 처벌수위때문에 분파

 

노론과 소론은 조선 후기 서인에서 분파된 정파이다. 숙종 초기에 정권을 장악한 남인은 허적을 중심으로 서인과 대치하고 있었다. 1680년 남인의 이환이 서인세력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였고 이듬해 남인인 허적의 장막어용사건이 발생하여 영의정에서 파직이 된다. 그러다 보니 남인이 역풍을 당하여 서서히 몰락해갔다. 이러한 와중에 서인 김석주와 김익훈이 남인 허적의 서자  견(堅)과 복창군(福昌君), 정(楨) 삼형제가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을 하자, 남인은 조정에서 대거 실각되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남인이 서인을 제거하려다 도리에 덜미가 잡혀서 남인이 정치적으로 패배하게 되었다. 서인이 정치적으로 승리하여 정권에 편승하게 된다. 동인에서 북인과 남인이 분파된 것처럼 서인에서도 남인에 대한 처벌수위를 놓고 노론(老論) 소론(少論)으로 분파가 된다.

 

송시열등 연로한 강경파는 노론이 되고, 처벌수위를 약화하자는 온건한 소장파학자들은 소론이 된다. 경종 때는 소론이 정권을 잡았고 영조때는 노론이 득세하면서 소론을 탄압하게 되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대립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蕩平策)을 추진하였으나 영조 전시기로 볼 때는 노론 위주로 정국을 운영하여 갔다.

 

시파와 벽파:친사도세자파와 반사도세자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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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영조 38)에 사도세자()라고도 불리는 영조의 세자가 폐위되고 죽은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당쟁에서 세자를 배척한 당파()이다. 시파는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폐위되고, 또 뒤주 속에 갇혀 참혹하게 굶어 죽었다고 생각하여 세자를 동정한 친사도세자파였다.

 

그러나 벽파는 반세도세자파로서 세자가 미쳐서  폐세자()의 변을 자초하였기 때문에 조금도 동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영조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그들은 미치광이 사도세자가 만일 왕위에 오른다면 나라를 망칠 것이므로 적극적으로 배척해야 된다고 반사도세자입장을 분명히 했다.  시파 ·벽파의 당쟁은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 ·순조 때에도 되풀이되었다.     

 

이처럼 순수하게 왕도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재야에 파묻혔던 사람학자들이 정치에 발을 들여놓음으로서 명분없는 사소한 이해관계로 인해 수백년동안 사색당파로 분열되면서 결국 임진란과 동학란을 자초하게 되었고, 외세의 침입을 허용하여 국가가 패망하는 지름길을 걸었던 것이다. 붕당정치는 사색당파로 몰락하게 되었고, 사색당파의 결국은 국내에서의 이해관계로 인해 국제외교관계에 눈을 돌리지 못하였고, 멀리 떨어진 섬나라 일본이 어떤 음흉한 계획을 하고 있는지 조차 눈치재치 못하였다.

 

결국 사색당파는 국제보다 국내파당에 머물다 보니 남쪽에서는 일본이 쳐들어와 임진왜란(1592년)을 일으켰고, 북에서는 청나라가 쳐들어와 병자호란(1636년)이 발생하였다. 조선왕조는 속수무책이었다. 최근에도 여야가 국제적 관계보다 내부의 이해관계에 머물러 심각하게 당파싸움을 하다 보니 대외적으로는 미국, 중국, 일본, 북한과의 관계가 파괴되어 나가고, 대내적으로는 경제질서, 사법질서, 교육질서, 종교질서가 파괴되어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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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호남인을은 임진왜란 때 단호하게 투쟁을 하여 왜구들을 소탕하는데 앞장섰다. 이순신이 호남없이 국가가 없다고 할 정도였다. 호남은 뚫리지 않았지만 영남지역이 뚫렸다. 왜구는 영남지역을 통하여 한반도로 진입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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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청나라는 사림파의 당쟁을 기회로 하여 임진란과 병자호란이후에 동학혁명이 발생하였을 때도 한반도에 침입하여 무고하게 양민과 농민을 학살했던 것이다. 호남인들은 임진란을 통하여 왜구를 몰아내고 동학혁명을 통하여 국내적으로는 적폐청산을 위하여 탐관오리들과 싸우고 대외적으로는 청.일에 대해서 가열차게 투쟁을 하였던 것이다. 한반도는 그야말로 피투성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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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세의 암흑보다 더 어둡고, 십자군이 다녀간 흔적처럼 피투성이가 된 한반도에 서구의 푸른 눈을 가진 곱쓸머리 선교사들이 성경책과 근대교육서적과 의료가방을 들고 들어와 한반도에 새로운 희망을 불어 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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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훈구파의 세도정치와 사림파의 사색당파로 인해 몰락하여 풍전등화에 놓인 위기의 조선왕조에 복음을 들고 온 선교사들을 통하여 조금씩 치료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예수가 한반도에 흔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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