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 (보성편)

서재필이 서구를 만났을 때

편집인 | 입력 : 2020/10/26 [17:08] | 조회수: 35

고흥에 김일, 유제두, 박지성이 있었고, 목포에는 민주주의를 행동하는 양심으로 실천한 김대중이 있었다면, 보성에는 우리나라에 민주주의를 최초로 소개한 서재필이 있었다.

 

서재필은 1864년 보성에서 출생한 사람으로 과거에 급제한 조선의 문신이고, 일제시대에는 독립신문을 창간한 언론인이며, 미국에서는 해부학자이며, 영문으로 소설을 쓴 문학가이며, 중추원, 농상공부 고문이기도 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의과대학 초빙교수이기도 했다.  서재필은 보성이 낸 천재였다. 보성에 가면 서재필 기념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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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은 우리나라에 제일 먼저 들어왔던 언더우드의 도움을 받아 미국에 정착하는데 성공했다. 한국에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뿐만아니라 미국에 있는 한국인들이 미국에 정착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특히 미국 선교사들은 한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하도록 주선을 하기도 했고, 관군에 쫏겨다니는 동학교도들이 미국으로 도피하도록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CBS와 뉴스앤조이는 기독교의 가면을 쓰고 기독교의 정신과 한국교회를 파괴하는 역할을 하지만 미국선교사들은 예수의 정신을 갖고 어디를 가든지 한인을 살리는 역할을 하였다.

 

선교사들은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앞장을 섰고, 일제의 제국주의의 실상을 외국에 알리는데 많은 공헌을 하기도 했다.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에 있는 외가 성주 이씨 집안에서 동복 현감 서광효와 이씨 부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의 6촌형인 서광효의 양자로 가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지게 되었다. 그의 양어머니는 세도정치로 유명한 안동김씨의 집안이었다. 이때 서재필은 양어머니의 오빠인 예조 참판의 집에 갔다가 김옥균을 만나면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는 김옥균의 도움으로 일본 사관학교에 가서 신식군대 훈련을 받고 와서 국내에 들어와서 신식 군대 훈련소인 조련국의 사관장으로서 생도들을 양성한다.

 

  사관생도 서재필

 

1884년 갑신정변이 발발했을 때 자신이 데리고 있었던 생도들이 무사로서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민비에 의한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하게 된다. 즉 쿠데타의 실패였다. 쿠데타에 실패하자, 그의 가족은 처참하게 몰살한다.  

 

가족의 몰살

 

아내는 자살하고 하나 있던 두 살된 아들은 돌봐주는 이가 없어 굶어죽는다. 음독한 어미의 젖을 빨다가 같이 죽었다는 설도 있다. 양가, 친가 가릴 것 없어 양아버지 서광하는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전락했고, 생부 서광효는 자결하였다.

 

생가 형제들 중 맏형 서재춘은 감옥에 갇혔다가 독약을 먹고 자살했고, 이복 형 서재형은 관군에 붙잡혀 참형을 당했다. 생모 이씨는 노비로 끌려갔다가 1885년 1월에 자살했고 서모와 이복 동생들 역시 죽임을 당했다. 서재필의 인생과 가족은 하루 아침에 파멸하고 말았다. 이처럼 개혁과 혁명은 목숨을 담보해야 했다.  

 

서재필의 출조선

 

서재필은 갑신정변 주역들과 함께 일본으로 도망갔고, 일본에서도 찬밥신세가 되자, 미국으로 망명을 하게 된다. 다행이 미국에서 정치 망명을 수용하여 서재필은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188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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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서부에 도착한 서재필이 동부지역으로 정착하게 것은 조선에 선교사로 와있던 언더우드의 주선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 있는 언더우드가 윤치호의 부탁으로 자신의 형에게 서재필을 소개하여 형이 서재필이 정착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윤치호도 서재필과 유사한 상황이었다.

 

윤치호는 개화파와 교분을 하였다는 이유로 갑신정변의 공모자로 몰려 중국으로 도피를 했다가 중국에서 1888년 감리교 계열의 반더빌트대학으로 유학을 와서 1891년 안식년으로 와 있었던 언더우드와 함께 세계 선교사 대회에 강사로 참여하여 조선의 상황을 역설하여 남장로교 7인의 선발대가 한국에 오도록 감동적인 연설을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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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와 윤치호 때문에 7인의 선발대가 한국에 와서 사역을 하게 되었다. 예수가 가슴에 들어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을 살리기 위해서 노력을 했던 것이다.

 

  언더우드와 윤치호

 

훗날 감리교신자인 윤치호는 애국가를 작사하였고, 문교부차관에 해당하는 지위에까지 오르고 그의 5촌 조카는 대한민국의 4대 대통령(윤보선)이 된다. 윤보선 대통령은 안동교회에 참석했다.

 

박영효는 미국생활을 접고 귀국했지만 가족도 모두 몰살을 하여 오고 갈데도 없는 서재필은  미국에서 버텨야 했다. 그는 가구점의 광고지를 배달하며 생계를 꾸렸다. 주말에는 교회를, 저녁에는 YMCA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영어를 배웠다. 

 

이때 서재필은 우연히 홀렌백(John W. Hollenback)이라는 펜실바니아 출신 사업가를 만나게 돼 1886년 펜실베니아로 거처를 옮기면서 그의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왔다.

 

서재필은 그해 가을부터 미국 수도 워싱턴 D.C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현 조지워싱턴 대학의 전신)의 야간부인 코코란 과학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3년 과정이었는데 서재필은 1년 만에 학사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미 교육당국은 서재필의 뛰어난 능력과 조선에서의 고위관리 경력을 참고해 이 같은 학위수여 결정을 내렸을 것으로 보인다.

 

서재필이 서구를 만났을 때

 

여기서 서재필은 과거시험을 보면서 한문을 외우던 실력을 발휘하여 라틴어, 그리스어 수학 등 여러 과목에서 우등생이 됐고 1887년 6월 졸업식에서는 대표로 졸업생 고별연설을 하기도 했다. 서재필이 서구를 만났을 때, 또다른 서재필이 되었다.

 

 

수련의 과정

 

서재필은 마침내 1889년 컬럼비아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해 3년 과정의 공부를 마치고 1892년 한인 최초로 미국 의학사(M.D.)가 되어 1893년에는 정식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미국에 도착한지 8년만에 미국의 의사가 된 것이다. 

 

서재필은 대학 재학 중이던 1890년 6월 10일에 한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는 가필드 병원에서 1년간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1895~1896년에는 모교에서 세균학 강사로 일했다.


서재필박사는 1895년 한국에서는 한창 동학혁명이 진행되어 있을 무렵 워싱톤에서 10년전에 헤어졌던 박영효를 우연히 만나 한국에 귀국을 하게 된다. 

 

갑신정변의 피해자인 서재필 박사는 귀국을 하여 독립협회를 만들고 독립협회에서 독립문을 건축하고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한글과 동시에 영자도 만들었다. 그는 이상재, 이승만 등과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중국을 사대주의화 한 모화관(慕華館)을 인수·개축하여 독립회관으로 하였다.

 

갑신정변은 당시 1,500여명을 동원한 청나라때문에 실패하여 청나라에 대한 한이 있었을 것이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무리들은 단지 신식군인 150명만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쿠데타 성공은 어려웠다. 더군다나 도와주기로 했던 일본이 배신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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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중국 사신을들 맞이하는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이는 청나라의 속국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출동때문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서재필은 한국에 오자마자 청나라의 유물부터 지우는 작업을 했던 것이다. 1896년 영은문을 철거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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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독립협회는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 따 독립문을 설립하기로 하여 1897년에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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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서재필은 수구파(守舊派) 정부와 일부 외국인의 책동으로 다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그이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다가 3·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잡지 《The Evening Ledger》와 제휴, 한국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국에 친화적인 성향의 미국인을 규합하는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미국에서도 그의 가족을 몰살시킨 조선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항일운동을 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서재필의 위대성은 조국을 항시도 잊지 않은 것이다.

 

그가 조선이 일제의 침략으로 속수무책 무너지고 있고 동학혁명으로 혼란했던 1895년 조선에 돌아와 자주정신 고취를 위한 계몽활동을 다양하게 벌인 것만 해도 그의 애국정신을 알 수 있다. 서재필처럼 동학혁명의 교주 전봉준도 당시에는 지성인이었다. 단지 그가 서구를 일찍 만나지 못할 뿐이었다. 

 

그는 한 때 대원군밑에서 일한 적이 있었고 대원군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청을 끌어들여 동학군을 몰살시킨 것은 대원군이 아니라 민비였다. 전붕준은 비록 동학의 접주였으니 한자외 유학을 가르치는 선비로서 위정척사의 정신을 갖고 동학혁명을 이끌었던 것이다. 혁명은 지성인들이 앞장설 때 가능했다.   

 

한문에 특출한 훈장이었던 전봉준은 동학과 위정척사의 정신으로 투쟁하였지만 서재필은 서구에서 배운 근대문명의 정신으로 투쟁하였다. 전봉준도 서구를 일찍 알았다면 우금치 전투에서 비참하게 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봉준은 한반도 전체 100만의 동학군을 모았던 당대 최고의 농민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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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은 미국에서 안창호와 교류하면서 미국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죽을 때까지 노력을 하였다. 서재필은 미국에 가기 전에는 일본의 힘을 얻어 개혁하려고 하여 친일개혁파라고 불리웠으나 미국에 망명한 이후에는 친미기독교파라고 불리울정도로 일본의 제국주의를 배제하고 미국의 민주주의 정신을 척박한 조선의 당에 일찍부터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는 아펜셀러가 세운 배제학당에서 처음으로 가르치면서 민주주의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당시 이승만이 배제학당에서 서재필의 민주주의 강의를 들으면서 훗날 기독교입국론을 꿈꾸기도 하였다.  보성출생인 서재필은 최초의 의학박사, 최초의 미국시민권자가 되었고, 기독교정신을 통한 민주주의를 한국에 소개한 인물이었다.

 

그는 1951년 눈이 감길 때까지 한국의 계몽, 민주주의를 한시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1945년 해방이후 이념논쟁과 신탁 반탁운동으로 어수선 할 때 미국의 하지중장이 대통령직을 요청하였지만 끝내 거부하고 말았다.

 

안규홍

 

서재필이 1864년 태어나서 1951년에 생을 마감한 것과 달리 안규홍은 1879년에 태어나 1911년에 생을 마감했다. 서재필보다 13년 늦게 태어나서 40년 일찍 생을 마감한 것이다. 둘다 보성사람으로서 공통적인 것은 항일정신이 있었던 것이다. 

 

서재필과 다른 것은 서재필은 양반집안에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하여 주로 개화파들과 연대하면서 신문명에 관심이 많았고, 서구화를 통하여 개혁될 수 있다고 믿었던 반면, 안규홍은 원래는 양반가문이었지만 오래전에 몰락하여 빈궁했고, 4살 때 아버지마저 여의게 되어 먼 친척에게 맡겨져 어린 나이부터 머슴살이를 하게 되었다. 부모없는 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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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담사리'였는데 이는 소를 먹이는 머슴아이를 뜻했다. 그러나 그는 하라는 머슴일은 잘하지 않고 어려서부터 나무몽둥이를 들고 동네에서 대장노릇을 하였고 세금걷는 관리가 행패를 부리면 크게 꾸짓고 혼내주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로 어려서 부터 기개가 당당했다.     

 

1907년 대한제국군대가 해산되면서 전국적으로 정미의병이 일어났는데 안규홍도 이 당시 보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주적은 친일파, 일본제국, 탐관오리들이었다. 안규홍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은 주로 빈농, 머슴들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렇다 할 무기 하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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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들은 안규홍이 머슴출신이라 판단하고 연대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의병을 일으켰던 사람들은 대부분 유생들이었던 반면에 안규홍부대는 보성출신의 소작농과 머슴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돈도 없었고 전략가나 뛰어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원도에서 내려온 강용언과 연대하였지만 강용언이 주민들이 재물을 빼앗고 해를 끼치자 그를 숙청해 버렸다. 

 

이후 안규홍의 부대는 해산한 군대, 강원도에서 내려온 부대 등으로 조직이 확대되어 세력이 커졌다. 토착 농어민은 지리에 밝고, 관동에서 내려온 병사들은 전투경험이 많고, 해산 군인은 전략 전술의 이론을 두루 갖추었다. 

 

안규홍의 부대는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들을 공격하고, 악덕 토호들의 재물을 빼앗아 농민들에게 친일단체인 일진회 회원들을 공격하기도 하여 절대지지를 받았고, 1908년 4월부터 1909년 10월까지 약 1년 6월 동안 26차례나 일본군과 싸워 승리하였다.

 

투쟁초기에는 직접 만든 칼, 창, 혹은 화승총이 전부였다. 시간이 가면서 일제로부터 노획한 대포나 30년식 보병총, 천보총 등을 보유하게 되었다. 신무기를 확보하여 화력이 성장했고, 지리와 지형지물에 밝아 전술운용을 잘하여 일제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일제도 다양한 방법으로 안규홍 부대를 탄압하였다. 1909년 4월 안규홍 부대를 진압할 목적으로 광주와 남원의 일본군 2개 수비 대대를 차출하여 토벌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 토벌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전남 지역 의병 부대에게 심각한 위기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자 안규홍 부대는 유생 의병장인 전해산, 심남일 부대 등과 연합해 전남 의병 연합 부대를 구성하고, 나주 남평과 영산강 일대에서 합동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 수십명을 살상하고, 일본 화물선을 불태우는 등의 전적을 거뒀다. 그러자 일제는 1909년 6월에 이르러 주요 의병 부대의 소재와 근거지를 파악하기 위한 변장 정찰대를 편성하였으며, 주요 의병의 근거지가 어느 정도 파악되자 전남 의병 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것이 바로 '남한 대토벌 작전'이다. 이 작전에는 보병 2개 연대, 공병 1개 소대, 기선 1척, 기정 약간, 그리고 해군 11함대 등 대규모의 병력이 한꺼번에 투입되었다. 그리하여 육지는 물론 해상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포위선을 구축하여 토끼몰이식으로 전남 의병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말까지 전개된 이 작전으로 일본군의 거미줄 같은 포위망이 안규홍 부대를 압박하자, 그 동안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해 왔던 안규홍 부대도 동요하였다. 9월 18일 ~ 19일 사이에 약 60여 명의 부하 의병들이 투항하자, 안규홍은 의병 해산을 명령한다.

 

후일을 기약하며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9월 25일 일본군에 체포되었으며, 1910년 6월 22일 대구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했다. 당시 사람들이 많은 성금을 모아 비석을 세워주었다. 1963년 건국 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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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보성은 일찍부터 항일 정신이 투철한 천재적인 사람들을 배출한 곳으로 한 명은 서구의 힘을 통하여 다른 한 명은 한민족의 힘을 통하여 일제에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보성은 예부터 유림과 유교사상이 투철하여 의병운동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1850년경 보성지방의 환곡부정사건을 파헤쳐 바로잡고, 1894년에는 유림들이 많은 연고로 동학교도들에게 항거하였고, 1905년에는 을사조약 체결을 반대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활동이 전개된 곳이기도 하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이 발표되었을 때에도 거세게 항의했을 정도로 국가에 대한 충효정신 강했다. 이는 보성의 유림들이 향교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그 위세도 강했기 때문이다. 보성도 나주나 고흥처럼 유림문화가 발달하여 기독교의 선교활동이 어려운 지역이었다. 

 

보성교회들

 

그러나 항일정신이 투철했던 보성에 복음이 전해졌다. 1904년 광주선교스테이션이 설립된 후 오웬목사는 보성, 고흥, 순천, 광양일대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1905년에 그의 조사였던 지원근이 보성지역에서 조상학을 전도하고, 조상학이 벌교 무만동의 김일현, 정태인을 전도하여 그들을 중심으로 한인들에 의하여 보성 최초로 무만동교회가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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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선군 벌교읍의 무만동 교회가 제일 먼제 설립이 되었다.  

 

  무만동 교회

 

보성읍교회는 1915년에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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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에 정착한 이두실과 정종귀가 기도모임을 갖게 되면서 보성읍교회가 태동하게 된다. 이두실집사는 일본식 건물을 짓는 신식목수로서 신문화에 관심을 두던 중, 신문화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을 전도하게 된다. 

 

황보익목사

 

초대 교역자는 이형숙 조사였고, 2대는 정기신 조사이고, 3대 교역자는 고흥읍교회를 태동시킨 목치숙조사였다. 4대 교역자는 황보익 조사이다. 황보익 조사는 1930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항일운동과 민족주의에 투철하여 교회를 많이 성장시킨다. 신사참배때도 거부를 하여 교회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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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수

 

그의 아들이 서재필 박사 이후 보성에서 가장 유명한 황성수 박사이다. 그는 1917년 전남 보성에서 출생하여  1937년 평양 숭실 전문 영문과 졸업 후, 일본 메이지대 영문과와  동경제대(도쿄대) 법문학부 대학원을 입학하여 1940년에 졸업을 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유학을 했고, 1942년에는 미 국방부 전시 정보국에 발탁돼 일본어, 한국어 방송 주임으로 근무했다. 1946년에는  귀국 후 한국 관계와 정계에 진출했다.

 

이승만 정권시절  참의원 의원, 국회부의장을 지냈고  전남도지사를 거쳐 명지대 법정대학장을 지내기도 했다.

 

 황성수 박사

 

신앙적으로는 전국기독청년면려회(CE) 회장, 한국기독교실업인회(CBMC) 초대 회장, 한국복음주의방송협회 이사장, 기독공보사 부사장, 대한예수교장로회(보수) 총회장을 역임했다. 황 목사는 1950년대 부산 피란시절부터 시작한 한국기독학생동지회라는 신앙강좌를 통해 20여 년간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1950년대 CCCIVF의 기초를 이룬 한국기독학생신앙동지회를 창립하고 학생 복음화 운동을 이끌었다.  1950년대 부산에 피난민이 몰리던 시절 부산 중앙교회에서 황성수 목사가 시작한 기독학생신앙동지회는 CCCIVF의 기초를 이루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기독학생신앙동지회 신앙강좌는 1970년대 초까지 서울 승동교회에서 매주일 오후 3시마다 진행됐다. 선교사들을 통하여 보성에 떨어진 작은 복음의 씨앗이 서재필과 황성수같은 훌륭한 사람을 길러냈던 것이다.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부여받은 보성은 천재 기독교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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